기독교곱씹기

가능계에도 신이 존재하는가

연결러 2023. 6. 20. 05:37

예전에 ChatGPT에 "가능계에도 신이 존재하는가?"라는 계열의 질문들을 한 적이 있었다. 다른 질문들과 마찬가지로, 가능계의 정의를 배경으로 깔고, 신의 속성인 '편재'(어디나 존재)에 대해서도 배경으로 깔기 위한 여러 사전질문을 먼저 하고 뒤이어서 했다.

 

그런데 이 질문들을 하는 과정에서 나 스스로 약간의 답을 얻은 것 같았다. 그래서 ChatGPT가 정작 무슨 답변을 해주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듯이, '천명'은 이미 존재하는 대상이고 기다림의 대상이 된다. 5km 전방에서 차가 나를 향해 60km/h의 속도로 돌진하고있다. 이 현실을 근거로 내가 사고할 수 있는 여러 가능계 중 어떤 곳에서는 차가 내 바로앞에서 멈추고 다른 곳에서는 차가 나를 치고 간다. 어떤 것이 사실일지는 5분 뒤가 되어야만 알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사실일지는 이미 정해져있다.

 

즉, 신의 뜻은 오기로 정해진 미래에 이미 성취되어 있으며 나는 그걸 '기다릴'뿐인 것이다. 나의 가능성의 영역들은 '존재'하지 않기에, 거기엔 신도 있을 수 없다. 그 안으로 신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은 신에대한 모욕이고 아마도 십계명에 나오는 '신의 이름을 헛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이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추측한다. -- 신의 세계(=세계 그 자체)에 내가 속한다는 현실과 대조하여 내 사고 안에 신을 속하게 한정한다는 것.

 

그럼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는 대체 왜 하는 것일까? 기도를 하건말건 뜻은 이루어지게 되어있다면 쓸모없는 낭비 아닌가? '이루어지다' (성취) 는 Aktionsarten (행동상적 분류) 중 [TELICITY]의 자질을 가진다. 즉, '이루어짐'의 성립 여부를 (예컨대) 매 1초마다 평가했을 때 계속 FALSE 값으로 평가되다가 어느 epiphany의 순간이 '도래'하면 평가 결과 TRUE가 도출되고 평가 과정 자체가 종료된다. 그렇다면 '이루어짐'의 진리치는 어떻게 평가되는가? '이루어짐'의 평가는 등치(equality)평가이다. 예컨대 "키가 자라서 160cm가 ***되다***"의 평가는 키의 값과 160cm가 같은지 지속적으로 평가하는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뜻이 이루어지다" 역시 신의 뜻과 나의 예상이 등치임을 평가한다. 그런데 뜻이 정해져있을때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법은 단 하나다. 바로 나의 상상을 그 뜻에 맞추는 것이다. 만약 달려오는 차의 현실에서 내가 차에 치이는 것이 정해진 뜻이라면,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나의 상상 (=나의 계획, 구상)을 "차에 치인다"로 한정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 역시 외향이 아니라 내향의 기도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해서 미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정해진 미래에 맞추도록 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정된 존재이기 때문에 '뜻'같은 건 알 수 없다. (심지어 겟세마네의 예수조차도!) 미래는 예상될 뿐이지 확정될 수 없다. 그래서 신앙은 매우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날이 오면 무기를 다 모아다가 농기계나 만들고 (미가 4), 양과 사자(사실은 이리라고 함)가 함께 뛰놀고 (이사야 11장) 그럴 것이라는 '믿음'에 나의 계획과 예상과 상상을 맞추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방산업체의 주식은 사지 않겠지ㅎㅎ)

 

그리고 상상하건대, likeness of God (인간이 창조된 양상은 '신과 유사하게'이다) 진술문 역시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한다.